왕과 사는 남자 후기 (단종, 박지훈, 한명회)
단종, 약한 왕이 아니라 불운한 왕이었다
단종이라는 이름부터 짧은 '단' 자가 들어가서 그런지, 저는 늘 이 인물을 권력 없이 휘둘리다 왕위를 빼앗긴 약한 존재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이 사람은 약했던 게 아니라 불운했던 거구나'였습니다. 세종의 손자로 태어나 분명 총명하고 왕으로서의 자질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그를 지켜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영화에서는 단종이 유배지로 가는 길에 울고 있는 백성들, 그리고 유배지를 몰래 찾아와 눈물 흘리며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이 왕은 백성들에게 분명 존경받고 기대받는 존재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났다면, 세종의 뜻을 이어 백성을 위하는 성군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세조가 집현전 학자들을 없애고 세종을 따르던 사람들을 제거하면서 조선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단종이 왕위를 지켰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자꾸 상상하게 됩니다.
박지훈의 연기, 그리고 최고의 명장면
박지훈 배우가 단종 역할을 위해 15kg을 감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스크린에서 보니 그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특히 눈빛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왕으로서의 품격과 동시에 어린 소년의 두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훌륭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자꾸 단종에게 이입하게 됐는데, 생각해보니 제목은 '왕과 사는 남자'로 엄홍도가 주인공인데도 단종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꼽는 최고의 명장면은 단종이 직접 관아로 찾아가 한명회와 대면하는 씬입니다. 엄홍도의 아들 승도가 단종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곤장을 맞고 있을 때, 단종이 나타나 한명회 앞에 섭니다. 이 장면에서 한명회는 정말 악덕하고 야비하게 그려지는데, 전직 왕이자 직계 왕족인 사람에게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를 보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화가 났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명회도 단종의 총명함과 왕으로서의 자질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그의 지위를 없애려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단종을 응원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겠다는 그 집요함이, 역설적으로 단종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단종이 금성대군에게 조금만 더 일찍 서신을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물론 유배지에서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도 필요했겠지만, 그 타이밍이 한명회가 눈치채기 전이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이었습니다.
승자만 기억하는 역사에 대한 질문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우리는 왜 승자의 업적만 배우는가'였습니다. 저도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세조의 업적은 줄줄 외웠지만, 조카를 죽이고 시체 수습까지 못 하게 한 그 잔인함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단종은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않았고, 그를 응원했던 사람들의 희생도 역사책에서는 몇 줄로 정리됩니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한 사람이 승승장구하고, 정당하게 살다 희생된 사람은 잊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건 단순히 500년 전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요즘 세조릉과 단종릉의 방문 리뷰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씁쓸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진짜 마음을 주는 건 정당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영화 속 엄홍도의 선택도 그렇습니다. 삼족이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러준 그의 용기는, 역사의 승자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택한 것입니다. 제목이 '왕과 사는 남자'인 만큼 엄홍도의 이야기도 주목받아야 하는데, 저를 포함해 많은 관객들이 단종에게 더 몰입하게 된 건 박지훈의 연기력도 있지만 그만큼 단종의 일생이 안타깝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
솔직히 말하면 영화의 연출이나 각본이 모두 완벽했던 건 아닙니다. 중간에 호랑이가 나오는 장면 같은 경우는 좀 부자연스러워서 몰입이 깨지는 느낌이 있었고, 몇몇 장면에서는 약간 오글거리는 연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을 충분히 덮을 만큼 스토리와 주제 선정은 정말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을 주인공으로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우리가 잊고 살았던 역사의 이면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가치가 큽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배울 때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앞으로 역사를 볼 때 승자의 기록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더 생각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단종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불운한 왕'이 아니라 '기억되어야 할 왕'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오랜만에 극장에서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가족, 연인, 친구 누구와 봐도 좋을 작품이니 꼭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단종릉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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